1989년 8월15일 임수경씨(가운데 왼쪽에서 세 번째)가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사진=연합뉴스)
남북관계는 언제나 예민한 이슈다. 대화와 협력, 민족 공조라는 이상은 언제나 매력적인 구호였고, 이를 내세운 정치세력은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실현하려면 먼저 분명한 전제가 있어야 한다. 상대에 대한 객관적 현실 인식,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지키겠다는 확고한 태도다. 오늘날 일부 진보세력이 북한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이 두 가지 전제 모두를 무너뜨린 채 이상만을 외친다.
북한은 3대 세습 독재 체제 아래 유엔과 국제사회로부터 반복적으로 인권 문제를 지적받고 있다. 표현의 자유, 이동의 자유, 정치적 권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공개 처형과 정치범 수용소, 강제노동은 이미 여러 탈북자 증언과 위성사진으로 확인된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 대해, 국내 진보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침묵하거나 외면해왔다.
그 이유는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 1980~90년대 운동권은 반독재와 반미를 기치로 내세우며 성장했다. 당시 많은 이들에게 미국은 군부독재를 지원한 제국주의 세력이었고, 북한은 미국과 대립하는 ‘민족해방 전선’의 한 축으로 간주됐다. 이들은 북한을 동등한 민족 주체로 바라보며, 내부 체제에 대한 비판을 유보하거나 무시했다. 이른바 ‘NL(민족해방)계열’의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1989년 임수경 사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대학생 신분이던 임수경은 전대협 회장의 주도로 밀입북했고,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했다.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지만, 이후 그는 정치권에 입문했고, 그를 북으로 보낸 임종석은 문재인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까지 올라섰다. 과거 북한 체제를 체험하며 공감했던 경험이 이후 정치적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이 사건에 대해 여전히 누군가는 “용기 있는 행동”이라 포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교부는 2020년,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1989년 외교문서 24만 쪽을 공개했지만, 임수경 관련 문건은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비공개 처리했다. 정권 핵심 인사의 과거가 총선을 앞두고 조명되는 것을 피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에는 민감한 개인정보는 없었고, 오히려 당시 정부가 유엔사와 외교적으로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 북한이 어떻게 판문점 귀환을 기정사실화하며 정치적 퍼포먼스를 연출했는지가 담겨 있었다.
문제는 이처럼 북한을 ‘이해’해야 한다는 태도가 단순한 관용의 수준을 넘어, 실제 국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지점까지 방치돼 왔다는 점이다. 북한은 분명한 적성국이며, 실제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간첩 사건이 지금도 발생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북한 지령을 받아 활동한 간첩단 사건이 반복적으로 적발되었고, 일부는 지역 시민단체나 노동단체에 침투해 여론 조작 시도까지 벌였다. 하지만 ‘간첩’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려지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국가보안법이 과도하게 적용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간첩 활동까지도 ‘사상 표현의 자유’로 포장할 수는 없다. 간첩은 실재하며, 그것은 표현이 아니라 지령에 따른 행동이다. 진보진영이 이 문제를 지나치게 회피하거나, 보수의 색깔론 정도로 치부한다면, 결과적으로 국민 안전과 국가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허물게 된다.
현실을 직시하는 시선으로 보자면, 남북관계는 대화와 견제, 협력과 경계라는 전략을 동시에 가져가야 한다. 지나친 반공주의가 시대착오적일 수는 있지만, 체제 미화와 현실 외면은 그보다 더 위험하다. 상식의 기준에서 바라볼 때, 북한은 대화의 대상일 수 있어도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지켜야 할 민주주의의 가치, 표현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북한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진보는 이상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상은 현실 위에 세워질 때만 의미가 있다. 북한 체제를 현실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정치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침묵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진보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진보가 진보답기 위해서는 이제 북한 앞에서 작아지기를 멈춰야 한다. 이념이 아닌 양심과 상식으로, 북한 문제를 다시 바라봐야 할 때다.